청혼가 잡담


나에게도 중학교 2학년 시절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당시 기억이 뚜렷하게 나진 않지만 학교에 가면 시커먼 놈들끼리 지내면서 누군가가 야한 잡지를 가져오면 신나서 돌려보고, 누가 구해왔는지는 모르지만 해적판 만화였던 '스피드 건'이라는 성기가 노출되는 만화책을 보면서 바지를 내린 채로 흔들기도 했고, 교과서 대신 '똘이의 경험'이라는 소설을 읽으며 성적 호기심을 해결하던 시기였다.

이 모든 것들이 학교 내에서 가능했다. 그렇다. 난 남자 중학교를 나왔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뽀샤시하고 자체발광의 외모와 우월한 기럭지를 가지고 있었다면 남자 중학교라도 할지라도 여자들을 만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난 특출난 외모도 아니거니와 호빗에 가까운 키를 가지고 있었기에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다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자와 가끔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바로 '학원'.

학교를 마치면 늘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들었다. 학교와 집이 좀 멀었기에 학원버스를 타고 이동을 했다. 학원버스가 여중 앞에서 학원생을 태우기 위해서 대기할 때면 저글링 처럼 쏟아지는 여중생들을 정신없이 살펴보며 내 마음에 드는 여학생을 찾는 것은 학원을 다니는 즐거움 중 하나였다. 물론 그렇게 찾기만 할 뿐 더 진전되는 건 없었지ㅠ 집과 학원은 가까웠기에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갈 때에는 학원버스를 이용하지 않았다.

학원은 남녀 합반이었다. 난 남녀 합반에 익숙하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남자들끼리의 세계에 푹 빠져버렸기 때문일까? 남녀 합반은 참 부담스러웠다. 예를 들자면, 학교에서 도시락을 먹다가 옷에 반찬이 떨어지면 학원가서 이 반찬자국을 어떻게 가려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할 정도였으니까.

그렇다고 학원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수줍은 많은 학생은 아니었다. 학원에서는 반 친구들과 즐겁게 장난도 치고 까불이처럼 행동을 했었다. 다만 마음에 드는 이성친구에게는 잘 접근하지 못하는.. 소심하지만 개구진 녀석이었다. 늘 장난만 치는 나를 이성친구들이 좋게 볼리가 없었다. 게다가 앞서 이야기했듯 훈남도 아니니까. 그래서 학원의 같은 반 친구들은 나를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대했던 것 같다. (곱씹으니 슬프군 ㅠ)




난 왜 그리도 인기가 없었을까...불이~ 까불이~



학원을 다니던 어느 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학원버스를 타고 수업을 들으러 가는 중이었다. 싸움 잘한다는 녀석들이 앉는다는 뒷자리..에는 못 앉고 뒷자리 바로 앞에 앉아서 아이들과 신나게 주절거리고 있었다. 버스의 중간쯤? 출입문 바로 옆에 앉아있던.. 평소에는 전혀 아는 척도 안하던 낯선 여중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저벅저벅 걸어서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게 아닌가?

여중생 : 저기.. OO오빠 맞지요?
나 : 네? 아.. 네.
여중생 : 혹시 여자친구 있어요?

어라? 뭐지? 미친 건가? 왜 나에게 이런 걸 물어보는 거지? 게다가 오빠? 오빠라면? 나보다 어리다는 건데.. 중학생이니까.. 1학년?

나 : 아.. 아니..?!

'왜'라고 묻기도 전에 옆에 있던 친구들이 '오올~~~~~~!!!'이라며 분위기를 띄워주었다.

여중생 : 아! 없어요?ㅋ 알겠어욬!!

그 여중생은 사실확인을 하더니 자신이 앉아있던 원래 그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러더니 옆에 있던 친구와 자기들끼리 꺄르륵거리는 게 아닌가? 분위기를 보아하니 나에게 물어본 그 여중생 보다는 옆에 있던 친구가 그 사실을 궁금해 한 것 같았다.

친구들은 수근덕 거렸다. 뒷자리에 있던 친구가 앞에서 운전하고 계시는 기사님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이야기를 했다.

친구 : 야, 너 그게 왜 물어보냐? 너 OO 좋아하냐?
친구들 : 오올~~~~~~~~~~~~~~!!!!
여중생 : 아뇨 ㅎ 저.. 맢프봠븕.. 말고 얘가요~

여중생의 친구는 오두방정을 떨면서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나에게 질문한 여중생은 결심이라도 한 듯 손가락으로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친구를 가리키며 크게 답변을 했다.

난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날 좋아해주다니. 그녀가 궁금했다. 그리고 얼굴도 궁금했다. 난 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 자리로 갔다. 얼굴을 보려 하니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고개를 절대 들지 않고 나에게로 돌리지 않았다. 약간 실랑이를 벌이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친구놈들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히히덕 거렸다.

학원버스가 학원에 도착하자 그녀는 자신의 친구와 함께 재빨리 버스에서 내려서 학원으로 뛰어 올라갔다. 철통보안이었다. 하지만 궁금한 건 못참지. 1학년이 수업을 듣는 교실에 들어가서 문을 열어가며 그녀를 찾았다. 두 개반 정도 확인을 했었나? 교실문을 열자 그녀가 보였다. 큰 눈과 진한 눈썹. 동그란 얼굴. 나를 확인하고 재빨리 고개를 숙여 얼굴을 숨기던 그녀. 교실 번호만 확인하고 내 교실로 돌아왔다. 잠깐이었만 그 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수업을 마치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계단에서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수업이 일찍 끝나 계단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수업을 마친 후 계단을 내려오다가 기다리는 나를 보더니 얼굴을 책으로 가리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려는 그녀를 붙잡고 이야기를 했다.

나 : 야, 너 이름이 뭐냐?
그녀 : 저..ㅈㅁ이요.
나 : ㅈㅁ..?
ㅈㅁ : 네.
나 : 야 사람이랑 이야기를 할 거면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해야지.
ㅈㅁ : 다..다음에요.
나 : 다음은 무슨 ㅋ 너 나 좋아한다고 그랬냐?
ㅈㅁ : 저 지금 버스타고 가야 하는데..
나 : 음.. 알겠어. 다음에 이야기 하자.
ㅈㅁ : 네..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후다닥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를 보니 뭔가 귀엽기도 했지만 속내를 시원히 말하지 않으니 답답하기도 했다. 다음날에도 학원버스에서 마주칠 때 얼굴을 가리고, 그 다음날에도 얼굴을 가리고 학원버스를 타기를 반복.

'도대체 얼마나 외모에 자신이 없길래 그러지?' 처음에 끌어올랐던 기분 좋았던 감정들도 그녀의 지나친 방어 앞에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잠깐 마주친 큰 눈과 짙은 눈썹은 기억이 나지만.. 그 뿐이었다.

별다른 감흥없이 설렘도 없어진 채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편지를 전해주었다, 친구를 통해서.

편지를 읽어보니 '좋아한다, 내가 여자친구가 되고 싶다.' 뭐 그런 내용. 하지만 인상깊었던 것이 있었는데.. 편지 서두에 박진영의 '청혼가'를 파란색 볼펜으로 직접 적어놓은 것.




박진영 - 청혼가

'니가 나의 애인(부인)이 되줬으면 해
나의 아이의 아빠(엄마)가 되줬으면 해
작은 집에서 둘이서 아침에 함께 눈뜨며
아침 햇살에 입을 맞추며
그대가 나와 결혼을 해준다면
나는 그대의 노예가 되어도 좋아
그대가 나의 사랑을 받아준다면
그대와 나는 영원히 함께할 거야'


괄호는 원래 가사.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지만 당시에는 꽤 신선하게 느껴졌다. 당시에 우리는 늘 발라드로만 사랑을 고백하지 않았었나? 댄스곡의 가사를 차용하여 큼직큼직한 글씨로 자신의 풋풋한 마음을 전달했던 그녀. 내 앞에선 소심하던 그녀의 의외의 선곡에 웃음이 났다. 게다가 가사에는 '입을 맞춘다'는 아주 음란한 내용의 가사도 있는뎁!!

난 다음날 바로 답장을 적었다. '보다 떳떳하고 자신 있을 때, 그 때 만나자'라고. 주제 넘은 거절의 답장이었다. 답장을 받아든 그녀는 얼마 되지 않아 학원을 그만두었고 그 이후로 그녀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ㅈㅁ아, 잘 지내니? 오빠는 잘 있단다. 근데 넌 도대체 어떻게 생긴거니?ㅋ



이제는 정말 청혼을 하고, 결혼을 할 나이이다. 많은 예식장에서는 지금도 사랑을 고백하기 위하여, 프로포즈를 하기 위하여 박진영의 '청혼가'를 부르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청혼가'는 단순히 중학교 당시 수줍음 많던 답답한 여중생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단편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세상의 풍파에 늙고 더렵혀진 나에게 지금 누군가가 박진영의 '청혼가'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다면 난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것 같다.

'노예가 되어 준다고? 노예? 밧줄, 가죽채찍, 회초리, 허리띠, SM Play...'

세월이란, 참.




덧글

  • 그리고나 2012/03/27 14:20 # 답글

    참 그 시절에는 뭐 그리 꺅꺅거리고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ㅋㅋㅋ 괜히 얼굴 뻘개지고 (전 소심해서) 제대로 말도 못하고.

    아마 지금의 제가 그 시절로 돌아갔으면 아마 더 빠르게 코와붕가....


    .........세월이란, 참.
  • 슈3花 2012/03/27 14:35 #

    그리고나 // 지금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좋아하던 여햏에게 인사도 하고.. 첫키스도 리드하고.. 첫코와붕가도 함께하고..

    세월이란, 참 ㅎ
  • 레드피쉬 2012/03/27 14:23 # 답글

    그녀의 외모는 김태희급;; 후회는 밀려오고;; 이런날 어울리는 노래는 외톨이ㅎㅎ
  • 슈3花 2012/03/27 14:36 #

    레드피쉬 // 아웃사이더 ㅠㅠ 가수이름과 곡명이 이렇게 잘 맞아떨어지다니!!
  • 귀차니 2012/03/27 18:01 # 삭제 답글

    역시나 재미진 글 감사하다능 ㅋㅋㅋㅋ
    근데 얼굴을 모르다니 ㅋㅋㅋㅋㅋ
  • 슈3花 2012/03/28 09:20 #

    귀차니 //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거얏!!ㅠ
  • Vm- 2012/03/27 19:22 # 답글

    얼굴을 모르는 게 참 아쉽군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조만간 이어서 써볼게요. ㅎㅎ
  • 슈3花 2012/03/28 09:21 #

    Vm- // 어렴풋이 생각은 나지만 얼굴이 마주보며 차근차근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는 게 아쉬운 부분입니다 ㅠ
  • Vm- 2012/03/27 19:25 # 답글

    근데 혹시 이 글도 건축학개론 후유증인가요?
  • 슈3花 2012/03/28 09:21 #

    Vm- // 아직 보진 못했지만 꼭 봐야겠다고 느껴지는 영화네요.
  • 로사 2012/03/28 23:12 #

    저 Vm-님 때문에라도 건축학개론 꼭 보려구요 ㅋㅋㅋ
  • 슈3花 2012/03/29 09:29 #

    로사 // 한가인과 수지는 Vm-님을 찾아가 고마움의 키스를 전해야 할 듯요 ㅎ
  • Vm- 2012/03/31 05:56 #

    감사합니다.
    한가인은 됐으니 수지한테 두번...!!!
  • 슈3花 2012/04/04 11:01 #

    Vm- // 역시 수지가 대세!!
  • DUNE9 2012/03/27 20:07 # 답글

    그리고 이글루스를 눈팅하던 미모의 여자는 예전 기억이 떠올라 비밀덧글을 남기는데..
    '오빠..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저 ㅈㅁ이에요..'
    이렇게 다시 그들의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랑의 2막이 시작....이번엔 청혼가를 부르실 차례겠군요..음하하
  • DUNE9 2012/03/27 20:08 #

    근데 쓰고보니 비밀덧글이 없어서 fail..
    저라도..(응?)
  • 슈3花 2012/03/28 09:55 #

    DUNE9 // 그녀는 나를 불러냈다. 그리고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나를 한적한 모텔로 데리고 갔는데.. 그녀는 그 때 왜 자신을 거절했냐며 이제는 자신을 품에 안아 달라며 입고있던 블라우스 단추를 푸는데..

    아 시밤 쿰 ㅠ fail ㅠㅠ
  • 601n829 2012/03/27 20:21 # 답글

    근데 [펌]이 없다는 것은...
  • 슈3花 2012/03/28 09:24 #

    601n829 // 저는 경험한 내용들을 주로..ㅎ
  • 로사 2012/03/28 23:13 # 답글

    청혼가가 어찌 저런 연상 작용을....?!!
  • 슈3花 2012/03/29 09:29 #

    로사 // 나란 남자, 음탕한 남자 ㅠ
  • volplane 2012/04/06 15:24 # 답글

    뵨태!!!
    근데 생각할수록 그뇨자가 용기가 대단했네요..그좁은 공간에서 그랬다니...
    용기만큼 얼굴도 아리따움이였을거에요...제발....
  • 슈3花 2012/04/06 16:52 #

    volplane // 그랬다면 더욱 아쉬움이 클텐뎁!!! 아니었을거예요!! 분명히 아니었을거예요!!

    중요한건.. 아리따운 여성분이 저를 택할리가 만무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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